2017년 2월 9일 목요일

《韓》한

[[韓]]은
ㅎ한,한,칸,환,훈,간,단,khan,dhan,han,hun같은 의미를 지닌다.

한민족이 한인(환인)의 후손으로 한(환)이며  천손인것이다. 우리 동이족이 사는 땅을  한의 땅이라 하였다.

우리가 알고있는 언어는 산스크리트어(범어)이며 겨례가
갈라져 나갈대 족보같은 기능으로 각 겨례의 세대와 혈통을 알아보는 표시로  히브리어,한자,한글등  문자라는 그릇에언어를  담아 분파해 나갔다.

한씨는 한국(韓)의 고유 성씨 이다.

대한민국에는
현재 청주한씨, 곡산한씨,충주한씨 가 존재한다.

청주한(韓씨)는 한국의 최고(最古) 역사를 지닌
이른바 삼한갑족(三韓甲族)이다.

본관은 오늘날 한씨 거의가 청주(淸州) 단본을 내세우고 있는데, 문헌에는 청주 외에 평산(平山)·한양(漢陽)·안변(安邊)·양주(楊州)·곡산(谷山)·홍산(鴻山)·대흥(大興)·부안(扶安)·개성(開城)·함흥(咸興)·금산(錦山)·단주(湍州) 등 10여 본이 기록되어 있으며, 모두 청주에서 분적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언제 어떻게 분적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한씨는 멀리 고조선시대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청주한씨세보》에 의하면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 왕인 준왕(準王)의 후대에 우성(友誠)·우평(友平)·우량(友諒)의 3형제가 있어, 각각 기씨(奇氏)·선우씨(鮮于氏)·한씨(韓氏)가 되었다고 하며, 따라서 청주한씨의 시조 한란(韓蘭)은 기자의 후예인 우량의 원손(遠孫)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종래 '기씨조선(箕氏朝鮮)'으로 알려졌던 고조선사회는 실상 '한씨조선'이고, 준왕은 '기준(箕準)'이 아니라 '한준(韓準)'이며, 따라서 한씨는 기자의 후예가 아니라 한국의 고유한 씨족이라는 것이 사학계의 통설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고조선의 한씨는 마치 부여의 해씨(解氏), 고구려의 고씨(高氏), 백제의 부여씨(扶餘氏), 신라의 박씨(朴氏)·김씨(金氏), 발해의 대씨(大氏), 고려의 왕씨(王氏), 조선의 이씨(李氏)와 마찬가지로 한국 고유의 대성(大姓)이었다.

고조선시대의 왕실이었던 한씨는 고려 후기에 이르러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는데, 우선 조선시대에 문과급제자 315명, 상신(相臣) 12명, 공신(功臣) 24명, 대제학 1명을 배출하였다. 한편, 왕비도 6명을 배출하였다. 오늘날 청주를 중심으로 한 충북 일대는 한씨의 동족부락이 적지 않아 신씨(申氏)와 함께 이 고장의 대성으로 꼽히고 있다.

청주한씨의 분포지역을 보면, 충간공파(忠簡公派)는 충남·경기, 문정공파(文靖公派)는 강원·경남, 몽계공파(夢溪公派)는 경상도 상주·합천, 관북파(關北派)는 평안북도 안변 및 함경도 함흥·영흥, 충성공파(忠成公派)는 충남·부산, 양절공파(襄節公派)는 전국 각처에 각각 분포되어 있다. 그밖에도 제주에 많이 살고 있는데, 이 일문(一門)은 고려 말기 예문관 대제학으로서 태조(太祖)를 섬기지 않아 유배된 천(蕆)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는, 7만 1022가구에 인구 39만 7817명으로, 성별 순위는 258성 중 제11위였고, 1985년도 조사에서는 가구수 14만 9511가구, 인구수 62만 8388명으로 274성 중 제11위였다. 2000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 70만 4365명,

가구수 21만 8821가구, 286성 중 제12위였다.

청주한씨의 세계(世系)는 시조 한란의 후대에서 30여 파로 나뉘는데, 그 중 후손이 많기로는 ① 양절공파, ② 문정공파, ③ 충간공파, ④ 몽계공파, ⑤ 관북파, ⑥ 충성공파 등 6파가 청주한씨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충성공파〉 한명회(韓明澮:충성공)는 시조 한란의 12대손 기(起)의 아들이다. 그의 조부 상질(尙質)은 고려 말기에 병마절도사를 역임하고 조선 개국 초기에 주문사(奏聞使)로 명(明)나라에 들어가 '조선'이라는 국호를 정해 받고 돌아온 사람이다. 증조부 수(脩)는 공민왕 때 대언(代言)이 되어 신돈(辛旽)이 집권하자 이를 반대하였으며, 당대의 명필로서 특히 예서와 초서에 뛰어났다. 종조부 상경(尙敬)은 조선 개국공신이 되어 공조판서·우의정 등을 지내고 영의정에 올라 서원(西原)부원군에 봉해졌다. 이렇듯 빼어난 가문을 배경으로 한명회는 수양대군의 심복으로 단종 1년 '계유정난'에서 정난공신 1등에 올라 이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세조의 뒤를 이어 어린 예종이 즉위하여 세조비 윤씨가 수렴청정(역사상 첫 大妃聽政)을 하게 되자 신숙주 등과 그 일익을 담당하여 4차례의 공신이 되었다. 특히 한명회 일가의 혼인 관계는 당대 지배층 성격의 일면을 드러내는 것으로, 그에게는 아들 하나 딸 넷이 있었는데, 맏딸은 세종의 부마인 '파평윤씨' 윤사로(尹師路)의 며느리가 되고, 둘째딸은 영의정 신숙주의 맏아들에게 출가하였으며, 셋째 및 넷째딸은 각각 예종비와 성종비가 되었다. 또, 손자는 성종의 부마가 되었다. 이렇듯 한명회 일가는 왕실과 이중삼중의 인척관계를 맺음으로써 족세(族勢)를 더욱 강화시킨 본보기이다.

〈양절공파〉 한확(韓確:양절공)은 세종 때 병조·이조판서를 거쳐 단종 때 우의정을 지내고, 세조 때 좌의정을 지냈다. 그의 딸은 덕종(성종의 아버지)비가 되었으며, 누이 둘은 각각 명(明)나라의 태종비(太宗妃)·선종비(宣宗妃)가 되었다. 또, 그의 세 아들 치인(致仁)·치의(致義)·치례(致禮) 등도 모두 현달하였다. 선조 때의 명상(名相) 응인(應寅)은 확의 6대손이다.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익모(翼謨)와 그의 형 대사헌 현모(顯謨)는 응인의 6대손이고, 이조판서 광회(光會)는 7대손이다. 또, 순조 때 영의정을 지낸 용구(用龜)는 현모의 손자이고, 예조판서 정교(正敎)는 용구의 손자이며, 고종 때 이조판서·대제학을 지내고 당대의 명문장으로 날렸던 장석(章錫)은 용구의 증손이다. 양절공파의 방계(傍系)로 확의 조카가 되는 치형(致亨)은 연산군 때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으나, 왕의 폭정을 충간하다가 참사를 당하였다.

〈문정공파〉 한계희(韓繼禧:문정공)는 관찰사 혜(惠)의 아들이다. 그는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세조 때에는 세자(世子)를 가르쳤으며, 성종 때에는 좌찬성에 이르렀다. 그는 '기내 훈구파(畿內勳舊派)'의 유학자로서 《경국대전(經國大典)》 《의방유취(醫方類聚)》 등을 편찬하였다. 형 계미(繼美), 아우 계순(繼純)도 모두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광해군 때 좌의정을 지낸 효순(孝純)은 계희의 현손이다. 당대의 이름난 학자로서 《동국지리지》를 저술하여 실학에 선구적 업적을 남긴 백겸(百謙)은 효윤(孝胤)의 아들이다. 그리고 석학 원진(元震)은 계희의 9대손이다.

원진은 영조 때 가장 걸출했던 학자로, 당시 심성론(心性論) 논쟁에서 '낙론(洛論)'인 이간(李柬)의 주장을 반대, 인간의 성(性)이 같지 않음을 주장하여 '호론(湖論)'의 영수가 되었다. 그는 김장생(金長生)-송시열(宋時烈)-권상하(權尙夏)로 이어지는 이이(李珥)의 학통을 계승, 송시열이 저술에 착수했던 《주서동이고(朱書同異考)》를 50년 만에 완성하였는데, 그 책은 한국 유학사상 괄목할 만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충간공파〉 고려 말기의 이부상서를 지낸 한리(韓理:충간공)를 시조로 한다. 그의 아들 승순(承舜)의 세 아들 서룡(瑞龍)·서봉(瑞鳳)·서구(瑞龜)의 후손에서 번창하였다. 특히 서룡의 아들 5형제 장손(長孫)·중손(仲孫)·종손(終孫)·천손(千孫)·만손(萬孫) 등이 빼어났다. 서구는 수양대군의 심복으로 계유정난에 공을 세워 정난공신에 오르고 중추원첨지사(中樞院僉知事)에 이르렀다.

〈몽계공파〉 세칭 보안한씨(保安韓氏)라 부르는 파로, 고려 말에 전법판서(典法判書)를 지낸 한철충(韓哲沖:몽계공)을 시조로 한다. 그는 고려가 망하자 산 속에 은거하면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다. 그의 아버지 희적(希迪)은 예의판서·보문각 대제학을 지내고, 조부 연(璉)은 보문각 직제학을 지냈다. 그의 아들 진(珍)·염(廉)·겸(兼)·문(文)은 각각 목사와 예조판서·현감 등을 지냈다.

〈관북파〉 세칭 안변한씨라 한다. 이들은 함남 북청·안변·함흥 일대에 많이 살고 있다. 시조인 한련(韓漣)은 예빈윤(禮賓尹)을 지내고 아들 유(裕)는 찬성사를 지냈으며, 고려 말에 밀직부사를 지낸 경(卿)이 그의 손자이다. 경의 딸이 이성계(李成桂)의 부인으로 신의왕후(神懿王后)에 추봉되었다. 태조가 즉위하자 문하부영사(門下府領事)를 지내고 안천(安川) 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밖에 한씨의 인물로는 동방 제1의 명필로 이름난 호(濩:石峯), 인조 때의 학자 교(嶠), 정조 때 동제활자(銅製活字)인 '한구자(韓構字)'로 이름난 구(構) 등이 있다. 근세의 인물로는 한말 참정대신으로 을사조약을 끝까지 반대한 규설(圭卨), 시인이며 승려로 3·1운동 당시 33인의 한 사람으로 활약한 용운(龍雲), 1936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흥형무소에서 옥사한 한글학자 징(澄) 등이 역사상에 길이 빛날 인물들이다.

《고대국가》

한민족의 계보는 크게 3개의 겨례로 갈라졌다가 한반도에서 삼한통합을 이루었다.

첫번째는 고대 한국시대 이후 한 겨례인 훈(흉노)제국의 김(금)씨 족으로 신라이다.

두번째는 고대 한국시대 이후 한 겨례인 진조선 계통의 부여족으로 고구려,백제이다.

세번째는 고대 한국시대 이후 한 겨례인 상나라(은나라), 기자조선,번조선,마한을 세운 한씨조상이다.

치우천왕사후

청주 한씨의 시조는

상나라 왕조를 세웠으며 주나라에 의해 패망하여 상나라 유민들이 흩어져 유랑생활을 하며 장사를하였다.

이들을 商(상)나라 사람들이라하여 상인(商人)이라 불렀으며 이들이 묘족으로 현재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사는 화교의 선조가된다.

타밀족,묘족,티벳,네팔족등이 상나라 계통이다.

상나라에서 분파한 겨례들이 서역 및 인도에 초기왕조를 세웠으며 석가모니 역시

商(상)나라(은나라)시대 따라이(현 네팔) 지방출신으로 단군의 후손이다.

은나라의 기자는 기자조선(한씨조선)을 세웠으며, 후에 진조선 단군의 윤허로 번조선

부단군으로 즉위하며 위만이 왕험성을 함락시키자 번조선의 준왕이 후에 마한을 세우고 고대 한의 땅에서 일어난 한국의 정통성을 계승한 단군이라하여 스스로 한왕이라 하였다.

후에 백제족의 반란으로 마한이 백제에 흡수되었으며 원왕의 3왕자가 각각 선우씨,한씨,기씨 성을 나눠가졌다.

단군은 천자의 호칭이며 여러 단군들이 고대 한국, 배달신시한국을 거쳐, 삼한,삼조선,부여 등을 다스렸다.

단군은 활을쏘는천자를 뜻한다.

그리하여 우리 한민족을 구성하는 고대 우리겨례를 큰활을 쏘는 민족이라하여 동이 라하였다.

단은 Dhan으로 드한 한 칸 간 모두 같은 의미이다.

단오제는 단군이 즉위후 조상 단군(환인,한인)께 고하는 제사로 옛 단군의 기상을 기리기 위해 말타기 활쏘기 등을 행하는 한민족 축제인것이다.

단군왕검은 제정일치시대의 무당(제사장) 겸 군왕(천자)을 칭하며 단이라는 글자는 활을 뜻하기도한다. 또한 단군을 텐그리 라고 부르며 태양신(한인,환인)뜻하며 왕검은 인간세계의 천자로 신의 세계와 인간세계을 동시에 주관하는 단군인것이다.

[참고] 《 부도지,성남문화유적,옥스포드사전,한단고기》 ,《강상원 박사님, 한동억 역사가님, 안경전 종도사님, 손성태 박사님,김정민 교수님,한동열 문화해설사님》강의및 저서 등등 고문헌 참조.

한국 한 韓 (ㅎ한, 칸,khan,간,훈,단,환,king)편집
한(韓)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773,404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순위 11위이다. 본관은 40본으로 조사되나, 곡산 한씨를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은 대본인 청주 한씨의 분파로 여겨진다.

최초로 문헌에 전해지는 인물로는 위만 조선에 우거왕 아들 장항(長降)과 함께 한나라에 투항한 한도(韓陶)라는 인물이 있었다.

청주 한씨편집
《청주한씨세보》에 따르면 마한(馬韓) 9대 원왕(元王)의 세 아들 우성(友誠), 우량(友諒), 우평(友平)이 각각 기씨(奇氏)·한씨(韓氏)·선우씨(鮮于氏)가 되었다고 한다. 족보에서는 기자조선(箕子朝鮮)을 건국한 기자(箕子)의 후예라고 주장하나, 이는 학계에서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선계를 고증할 수 없어 고려 개국공신 한란(韓蘭)을 시조로 삼고 있다.

청주 한씨(淸州 韓氏)의 시조 한란(韓蘭)은 현재의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난곡리에서 한지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40세 무렵에 현재의 청주시 상당구 방서동(方西洞)으로 이거하여 마을 언덕에 무농정(務農亭)을 짓고 방정리(方井里) 무농평(務農坪)의 농토를 개척하여 부농이 되었다고 한다. 928년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후백제의 견훤(甄萱)을 정벌하기 위하여 청주를 지날 때 한란은 왕건을 군례(軍禮)로 맞이하고 창고의 곡식을 풀어 하루 동안 왕건의 10만 군대를 배불리 먹였으며, 왕건과 함께 종군(從軍)하여 큰 전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한란은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이 되었으며, 벼슬은 삼중대광 태위(三重大匡 太尉)에 올랐다.

가주 한씨, 금산 한씨, 평산 한씨, 한양 한씨, 안변 한씨, 부안 한씨, 홍산 한씨 등은 청주 한씨에서 분파되었다.

인물로는 조선시대 문신 한상경, 한확, 한명회, 한치형, 한효원, 한백겸, 한원진, 한익모, 서예가 한호, 대한제국 관리 한창수, 시인 한용운, 대한민국 국무총리 한승수, 한덕수, 한명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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